'내 사제.'
희두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산을 내려오는 내내, 그리고 산자락을 벗어나 벌판으로 접어든 뒤에도.
사제(師弟).
같은 스승 아래에서 배운 자를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까 신라 북단에 있다는 그 사람은, 철혁과 같은 스승에게 배운 자라는 뜻이었다.
'...스승님의 스승님.'
희두는 문득 두 계절 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청류를 처음 배우던 날. 성관에게도 가르치겠다는 말에 자기가 반발했을 때, 철혁이 했던 말.
'내 스승님은, 배울 그릇이 되는 자에게는 출신을 따지지 않고 가르쳤다. 너희들에게는 사조가 되겠군.'
그때 희두는 뭔가를 물으려다 말이 잘렸다.
"스승님."
"뭔가."
"사조님 말입니다."
철혁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그날 제가 물으려던 걸, 스승님이 자르셨지요."
"...그랬나."
"이제는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철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 아버지십니까."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한참 만에 철혁이 걸음을 멈췄다.
"그래."
희두는 그 자리에 서서 스승의 등을 봤다.
이상하게도, 놀랍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흙바닥에 지도를 그리던 손을 봤을 때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자르고 일어서던 뒷모습을 봤을 때도, 어딘가에서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만 확인받지 못했을 뿐이었다.
"...언제부텁니까."
"무엇이."
"언제부터 아버지께 배우셨습니까."
철혁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일곱 살."
"부모가 없었다."
철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전쟁 때문이었는지 역병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 없으니까. 정신을 차려보니 남의 집 뒷마당에서 먹다 남은 것을 주워 먹고 있었다."
희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네 아버지가 나를 데려갔다."
"...저희 집으로요?"
"아니. 다른 곳이다."
철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고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곳이 있었다. 네 아버지가 만든 것이지."
"그런 게 있었습니까?"
"몰랐겠지. 있었던 걸 아는 자가 많지 않다."
희두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여섯 살에 돌아가셨으니까. 남은 것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와, 저택에 걸린 초상 한 폭, 그리고 손님들이 하던 말뿐이었다.
훌륭한 분이셨다. 나라를 위해 애쓰셨다. 전장에서 돌아가셨다.
전부 그런 말들이었다.
고아를 모아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왜 아무도 그 말을 안 했습니까?"
"할 수 없었으니까."
"왜요?"
철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서 뭘 배웠습니까?"
"글과 검."
"둘 다요?"
"둘 다다."
철혁이 앞을 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하나만 아는 자를 싫어했다. 검만 아는 자는 남의 검이 되고, 글만 아는 자는 검을 아는 자를 당해낼 수 없다고."
희두는 그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고 생각했다.
두 계절 전, 흙바닥에 지도를 그려놓고 철혁이 했던 말.
'검만 휘두를 줄 아는 자는, 결국 남의 검이 된다.'
'그건 스승님 말이 아니었구나.'
희두의 걸음이 잠시 흐트러졌다.
지난 두 해 동안 자기가 배운 것들. 아침마다 흙바닥에 그린 지도, 오후의 검, 물처럼 흐르라던 구결.
그게 전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로.
희두는 더 물을 말을 찾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입을 다물고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성관이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아까부터 대화에 한 번도 끼지 않고 있었다.
희두는 걸음을 늦춰 그 옆으로 갔다.
밤새 땅을 파고, 아침부터 걷고, 지금까지 거의 말이 없었다. 얼굴은 씻어냈는데도 어딘가 지저분해 보였다.
"...괜찮냐."
"응."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다니까."
성관은 그 말만 하고 시선을 돌렸다.
해가 기울 무렵, 철혁이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
길에서 한참 벗어난 숲 안쪽이었다. 사람이 다닐 만한 곳이 아니었다.
"불은 피우지 않는다."
"...예."
희두는 그 말에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톳불 앞에서 자는 게 당연했는데.
세 사람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말린 육포 몇 조각을 나눠 씹는 게 전부였다.
밤이 깊었다.
희두는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몸을 일으켜 보니 성관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올리고, 어둠 속을 그냥 보고 있었다.
희두는 잠시 망설이다 그쪽으로 갔다.
"...안 자냐."
성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두는 옆에 앉았다.
한참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손이."
성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이 아직 그래."
"뭐가."
"들어가는 느낌이."
희두는 무슨 말인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눈 감으면 그게 계속 남아 있어. 뼈에 걸리던 것도, 그다음에 쑥 들어가던 것도."
성관이 자기 오른손을 들어 폈다 오므렸다.
"검을 놓으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안 없어지네."
희두는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위로할 말이 없었다. 자기는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으니까. 죽일 뻔은 했고, 죽을 뻔도 했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런데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지금 성관에게 필요한 건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
"...그놈이 먼저 찔렀으면."
희두가 말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게 네가 아니었겠지."
"알아."
"아는데도 그래?"
"응."
성관이 짧게 웃었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이었다.
"아는 거랑 상관이 없더라."
그리고 성관이 덧붙였다.
"...스승님 말이야."
"어."
"아까 그러셨잖아. 나는 그냥 수단이었다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끝날 물건이었다고."
희두의 표정이 굳었다.
"그거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뭔데."
"화가 안 났어."
성관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맞는 말 같더라고."
희두는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이렇게 말했다.
"틀렸어."
성관이 고개를 들었다.
"뭐?"
"틀렸다고."
희두는 앞을 보며 말했다.
"그놈들한테는 그랬겠지. 근데 우리한테는 아니잖아."
"...우리?"
"두 해나 같이 굴렀는데."
희두는 성관 쪽을 보지 않았다.
"밥도 네가 다 했고."
성관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희두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고, 굳이 다시 묻지 않았다.
새벽녘, 희두는 눈을 떴다.
철혁이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자는 것 같지 않았다. 밤새 그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희두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제자였다.
일곱 살에 거둬져서, 글과 검을 배우고, 그리고—
'그리고 왜 우리 집 호위무사가 되었을까.'
물어야 할 것이 아직 산더미였다.
아버지는 어떻게 죽었는지. 왜 그 고아원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는지. 왜 스승은 자기 경지를 십 년 동안 숨겨왔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저들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가.'
날이 밝자 철혁이 일어섰다.
"가자."
"...스승님."
"뭔가."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철혁의 등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아직이다."
또였다.
희두는 이번에는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말씀하시겠지.'
그때가 오면, 자기가 그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세 사람은 다시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