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혁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순간 철혁의 왼손이 움직였고, 희두는 그 궤적을 보지 못했다.
검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자의 오른팔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그리고 그자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낼 수 없었다. 아혈이 짚인 것 같았다.
철혁의 손가락이 그자의 목덜미와 어깨, 허리를 차례로 짚었다. 몇 번 스치듯 지나갔을 뿐인데, 그자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희두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얻었다.
동굴 입구 쪽에 셋이 쓰러져 있었다.
하나는 엎드린 채, 하나는 옆으로 누워 있었고, 하나는 바위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셋 다 움직이지 않았다.
희두는 그 광경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상했다.
싸운 흔적이 없었다.
바닥이 파이지도, 돌이 튀지도 않았다. 희두가 굴렀던 자리에는 흙이 온통 헤집어져 있는데, 저쪽은 처음 그대로였다.
마치 셋이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쓰러진 것처럼.
'...언제.'
싸움이 시작되고 얼마나 지났던가. 희두는 헤아려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백 합은 족히 주고받은 것 같기도 하고, 열 합도 안 된 것 같기도 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자신이 벽에 몰려 죽을 뻔하는 동안, 스승은 이미 다 끝내놓고 있었다는 것.
"성관."
철혁이 불렀다.
성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검을 늘어뜨린 채로, 발밑에 엎어진 것을 내려다보면서.
희두는 절뚝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봐."
반응이 없었다.
"어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성관의 눈이 희두 쪽으로 움직였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었다.
"...나."
"어."
"내가 죽였어."
희두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다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저놈이 먼저 죽이려 했다고 해야 하나.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전부, 지금 이 순간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얼굴."
결국 희두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뭐?"
"얼굴에 묻었다."
성관이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문질렀다. 손등에 붉은 것이 묻어났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성관은 다시 손을 내렸다.
그들을 바라보던 철혁은 시선을 돌려 무릎 꿇린 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철혁은 그자의 손목을 잡았다. 맥을 짚는 자세였다.
"두 계절 전, 이 산에 하나가 왔다."
그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철혁은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자는 돌아가지 못했다."
여전히 무표정.
"그래서 이번엔 다섯을 보냈군."
철혁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아니, 다섯을 보낸 건 그 때문이 아니군."
그자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장터로군."
희두는 숨을 들이켰다.
"두 달 전, 산 아래 장터에서 소년 둘이 왈패 넷을 눕혔다. 그 소문이 흘러갔겠지."
철혁은 손목을 짚은 채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를 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군."
그리고 철혁은 손을 놓았다.
"스승님. 저자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은 안 했지. 할 수도 없고."
철혁이 일어섰다.
"하지만 몸은 했다."
"...예?"
"사람은 자기 몸을 속이지 못한다. 아플 때 아프다고 하는 것과 같다. 아니라고 우겨도 맥은 뛰고, 숨은 가빠진다."
철혁이 그자를 내려다봤다.
"방금 장터라는 말에, 이 자의 맥이 한 번 튀었다. 그 전까지는 잔잔했지."
희두는 그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 때문이구나.'
두 달 전 그날, 노인의 손등을 밟던 발을 보고 참지 못했던 그 순간. 그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철혁이 다시 물었다. 아니, 말했다.
"뒤따라오는 자들이 있나."
잠시 뒤 철혁은 스스로의 질문에 답했다.
"...그에 대해서는 모르는군."
잠시 뒤 다시 철혁이 말을 꺼냈다.
"그러면 처음부터 맞춰보지."
그자의 눈이 철혁을 향했다.
"먼저 사라진 건 저 아이다."
철혁이 성관 쪽으로 턱을 까딱였다.
성관이 고개를 들었다.
"쓸 만한 패는 아니었겠지. 그저 명문가 자제 하나를 없애기 위한 수단이었을 테니.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끝날 물건."
희두는 옆에서 성관의 어깨가 굳는 것을 봤다.
"그런데 죽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았다. 시신도 나오지 않았지. 그게 첫 번째 의문이었을 게다."
"그리고 얼마 뒤, 죽이려던 자도 사라졌다."
철혁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가진 어린 것과, 그것을 처리하러 보낸 것이 함께 사라졌다. 그쯤 되면 우연이라 여길 수 없지."
"그래서 찾기 시작했겠지. 그런데 아무 흔적이 없었다. 두 계절이 지나도록."
철혁은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소문 하나가 들려왔다. 산 아래 장터에서 어린 것 둘이 왈패 넷을 눕혔다는 이야기. 용모를 그려 돌려보니 두 녀석 다 찾던 얼굴이었겠지."
희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부터 장터 인근을 뒤졌겠지. 산이든 골이든 사람이 머문 자리를 전부. 그리고—"
철혁이 고개를 들어 동굴 천장을 한 번 훑었다.
"여기를 찾았군."
무릎 꿇린 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철혁은 그 손목을 놓지 않았다.
"틀린 게 있나."
그자는 눈을 감았다.
"없군."
철혁이 짧게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너희는 이 아이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죽이러 왔지."
희두는 그 말을 듣고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포섭하려는 것도, 인질로 삼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없애러 온 것이었다.
'왜.'
그 물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지금 물어볼 자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철혁이 그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제 하나만 묻자."
그자의 눈이 다시 떠졌다.
"너는 뭐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주쯤 되나."
철혁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아니군."
그리고 다음 말이 나왔다.
"...단주 정도인가."
그 순간이었다.
그자의 얼굴에서, 눈에 띄게 표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눈이 커지고, 이마에 힘줄이 섰다. 소리를 낼 수 없는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
철혁의 손이 움직였다.
'어—'
희두가 소리를 내기도 전이었다.
손가락 두 개가 그자의 가슴 어딘가를 짚었다. 소리도, 피도 없었다.
그자의 몸이 앞으로 천천히 기울더니, 그대로 엎어졌다.
끝이었다.
희두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방금 죽은 자는 무릎이 꿇려 있었고, 팔이 꺾여 있었고,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자를, 스승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죽였다.
"스승님."
"뭔가."
"...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철혁이 일어서며 옷자락을 털었다.
"그래."
"그런데도—"
"살려두면 어떻게 되나."
희두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자는 오늘 여기서 무엇을 봤나."
희두의 머릿속에 방금 전의 광경이 떠올랐다.
맨손으로 검날을 잡던 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쓰러진 셋.
"...스승님을 봤고.. 저희 둘을 봤습니다."
"그래."
철혁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희두는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스승이 지금껏 무엇을 그토록 숨겨왔는지, 그리고 왜 다섯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는지.
철혁은 시신 다섯 구를 하나하나 살폈다.
옷깃을 헤치고, 소매를 걷고, 목덜미를 들여다봤다. 무엇을 찾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세 번째 시신에서 철혁의 손이 멈췄다.
희두가 그 옆으로 다가가 보니, 목덜미 아래쪽에 작은 문양 같은 것이 있었다. 화상 자국인지 낙인인지 알 수 없는, 손톱만 한 표식이었다.
"이게 뭡니까?"
철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나머지 시신들의 목덜미를 차례로 확인하고 나서, 짧게 한마디 했다.
"...다섯 다 있군."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아주 옅은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희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태울 수는 없다. 연기가 오르니."
철혁이 일어서며 말했다.
"동굴 깊숙이 묻는다."
희두와 성관은 말없이 검을 들었다. 흙을 파는 데 검을 쓰는 것이 이상했지만, 다른 도구가 없었다.
밤새 그렇게 땅을 파내려갔다.
성관은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멈추지도 않았다. 희두보다 오히려 깊게, 오래 팠다.
해가 뜰 무렵에야 다섯을 다 묻었다.
"가자."
철혁이 자루를 어깨에 걸쳤다.
희두는 동굴 입구에 서서 안쪽을 한 번 돌아봤다.
두 계절 넘게 살았던 곳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답답한 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여기서 자신은 살아남았다.
"...스승님."
"뭔가."
"아까, 왜 바로 안 오셨습니까?"
앞서 걷던 철혁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주변을 봐야 했다.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되니까."
"...그게 다입니까?"
철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두는 알 것 같았다. 스승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어디까지 버티는지를.
그리고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손을 뻗었다.
산길을 내려가며, 희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스승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철혁은 앞만 보고 걸었다.
"맨손으로 검날을 잡으셨습니다. 셋을 눈 깜빡할 사이에 죽이셨고요. 그건... 그건 절정의 고수, 아니 웬만한 초절정의 고수도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죽을 뻔했고, 성관은—"
희두는 말을 멈췄다. 뒤따라오는 성관을 흘긋 돌아봤다.
성관은 아무 표정 없이 걷고 있었다. 얼굴의 피는 계곡물로 씻어냈지만, 눈빛은 아직 씻기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는 말씀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참 만에 철혁이 입을 열었다.
"남쪽으로 간다."
"남쪽이요?"
"신라 북단까지."
희두는 눈을 크게 떴다. 흙바닥의 지도가 떠올랐다. 고구려 남쪽 끝에서도 한참을 더 내려가야 닿는 곳이었다.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요?"
철혁이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내 사제."
희두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