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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협

대협 8화

by 인생인턴 2026. 8. 13.

"며칠 자리를 비우마."

 

철혁이 그 말을 꺼낸 건 청류를 익히기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심법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구결은 외웠고 자세도 알았지만, 정작 기운이 그 길을 따라 흐르지 않았다. 물처럼 흘러야 한다는 그 말은 참 쉬운데, 몸에는 자꾸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볼일이 있다."

 

"무슨 볼일—"

 

"산을 내려가지 마라."

 

말을 자르는 방식마저 익숙했다. 희두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와도 엮이지 말고. 사흘, 길어야 닷새면 돌아온다."

 

그리고 철혁은 정말로 그 말만 남기고 떠났다.

 

동굴은 이상하리만치 넓어졌다.

 

셋이 있을 때는 좁다고 느낀 적도 있었는데, 하나가 빠지자 공간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화톳불 앞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도, 평소보다 어색한 침묵이 자주 내려앉았다.

 

"...스승님, 어디 가신 걸까."

 

성관이 불쑥 물었다. 언제부턴가 그도 철혁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나한테도 말 안 하시는데."

 

희두는 목검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대꾸했다.

 

 

 

닷새가 지났다. 철혁은 오지 않았다.

 

엿새째 되던 날, 성관이 곡식 자루 바닥을 긁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오늘로 끝이다."

 

희두는 그 자루를 한참 들여다봤다.

 

"물은?"

 

"물이야 계곡이 있으니까. 근데 물만 먹고 수련할 수는 없잖아."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희두였다.

 

"내려가자."

 

"안 돼. 스승님이 뭐라셨는지 잊었어?"

 

"그럼 굶으면서 기다릴까? 하루면 몰라도, 언제 오실지 모르잖아."

 

성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산 아래 마을까지 반나절도 안 걸릴 거야. 곡식이랑 고기만 조금 사서 바로 올라오면 되잖아."

 

철혁이 식량을 구해올 때, 아침 일찍 동굴을 나서 점심 먹을 시간 전에 돌아왔기에 희두는 자신만만하게 반나절도 안 걸릴 것이라 이야기했다. 성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장서."

 

산을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두 계절을 동굴에서 보내는 동안, 희두는 자신이 얼마나 깊은 곳에 있었는지 몰랐다. 철혁과 자신의 이동 속도에 차이가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할 무렵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을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 들어선 순간, 희두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 짐승 우는 소리,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동굴에서는 바람과 물과 불 소리밖에 없었는데, 여기에는 소리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냄새도 있었다. 흙냄새, 짐승 냄새, 어디선가 무언가를 삶는 냄새.

 

"...뭐 해. 안 가고."

 

성관이 툭 치자 희두는 정신을 차렸다.

 

장터는 크지 않았다. 좌판이 스무 개나 될까 싶은 규모였고, 그마저도 물건이 성글었다. 곡식을 파는 자리는 한 곳뿐이었는데, 값을 묻고 나서 희두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택에 있을 때 알던 값의 두 배는 됐다.

 

"많이 올랐지요."

 

곡식을 담아주던 노인이 희두의 표정을 읽고 말했다.

 

"물량이 갑자기 줄어서 그렇소. 벌써 두 달째요."

 

"물량이 왜 갑자기 줄어들지요?"

 

"군량으로 다 걷어간다는군. 또 뭔 일이 나려나 보다 하는 소리도 있고 말이오."

 

노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희두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돌아서서 걷는 길에도 비슷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팔이 없는 사내가 담벼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다리를 저는 이도 있었다. 그런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전쟁 때 다친 사람들인가."

 

희두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성관이 짧게 대꾸했다.

 

"우리 마을도 그랬어. 열에 셋은 안 돌아왔지."

 

희두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십 년 전 그 전쟁을, 희두는 저택 안에서 겪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어머니가 며칠을 울었고, 그리고 그 뒤로도 삶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마저도 너무 어릴 때의 기억이라 흐릿했다. 그게 희두가 아는 전쟁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일은 장터를 벗어나기 직전에 벌어졌다.

 

"어허, 이 늙은이가 말귀를 못 알아듣네."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돌아보니 사내 넷이 좌판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좌판을 지키는 건 아까 곡식을 담아준 그 노인이었다.

 

"자릿세라 하지 않았소. 이 장터에서 장사하려면 내야지."

 

"...지난달에도 냈소이다."

 

"지난달은 지난달이고 이번 달은 이번 달이지."

 

사내 하나가 좌판을 발로 툭 걷어찼다. 곡식 자루가 쓰러지며 알곡이 흙바닥에 쏟아졌다.

 

주변 사람들은 시선을 피했다. 몇몇은 아예 걸음을 빨리해 자리를 떴다.

 

희두의 발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움직였다.

 

"이봐."

 

성관이 팔을 잡았다.

 

"엮이지 말라셨잖아."

 

"...알아."

 

"안다면서 왜 가."

 

희두는 잠시 멈춰 섰다. 성관의 말이 옳았다. 곡식은 이미 샀고,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철혁의 당부도 있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쏟아진 알곡을 주우려고 노인이 몸을 숙였다. 사내 중 하나가 그 손등을 밟았다.

 

희두는 성관의 손을 뿌리치고 걸어갔다.

 

"거 뭐야, 넌."

 

사내 넷의 시선이 돌아왔다. 희두는 대답 대신 노인의 손을 밟고 있는 발을 내려다봤다.

 

"발 치우시죠."

 

"뭐?"

 

말은 거기서 끝났다.

 

사내가 주먹을 휘둘렀다. 희두는 그것을 보았다. 아주 또렷하게, 느리게 오는 것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밀어내지 않았다. 손목을 받아 그 힘의 방향대로 살짝 틀었을 뿐인데, 사내는 제 힘에 끌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

 

희두 자신이 더 놀랐다. 그렇게 하려고 생각한 게 아니었다. 그냥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물은 다투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간다.

 

두 번째 사내가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발을 반 보 옮기고, 어깨를 살짝 비틀자 상대는 스스로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함께 덤볐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그림자가 하나 움직였다.

 

성관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오른쪽 사내를 맡았다. 굳이 신호를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의 움직임은 어긋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매일같이 서로를 상대해온 몸이었다.

 

싸움은 다섯 합도 가지 않았다. 아니, 싸움이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넷이 모두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죽은 이는커녕 크게 다친 이도 없었다. 그저 일어서기 귀찮을 만큼만 아플 뿐이었다.

 

"...가시죠."

 

희두가 말하자 사내들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물러났다.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노인이 연신 허리를 숙였다. 희두는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별것도 아닌데."

 

"별것이다 마다요. 아무도 나서주지 않았는데."

 

노인은 흙바닥에 흩어진 알곡을 주워 담으며 말했다. 희두도 얼결에 같이 주웠다.

 

"뉘 댁 자제분이신지, 존함이라도—"

 

"아, 그런 건 됐습니다."

 

희두는 손사래를 쳤다. 이름을 밝힐 수도 없었고,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소협."

 

희두는 당황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소협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이만."

 

희두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길, 희두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겼는데 통쾌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우쭐했을 텐데. 저잣거리에서 시비 붙은 자를 눕히고 낄낄대던 게 불과 두 해 전인데.

대신 떠오른 건 철혁의 목소리였다.

 

'절정에 이른 자들이 널려 있다.'

 

방금 눕힌 넷은, 삼류에도 못 미쳤을 것이다. 그런 자들 앞에서 우쭐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 더.

 

노인의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 희두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랐다. 태어나서 받아본 적 없는 종류의 말이었다. 김가의 도련님으로서 받아온 인사는 많았지만, 그건 전부 아버지의 이름에 하는 인사였지 희두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방금 그 노인은, 희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고맙다고 했다.

 

'...뭐지, 이 기분은.'

 

산길을 반쯤 올랐을 때, 성관이 뒤에서 말했다.

 

"어이."

 

"왜."

 

"아까, 뭐라고 안 할게. 나도 어차피 같이 뛰어들었으니까."

 

희두는 피식 웃었다.

 

"고맙다."

 

"근데 스승님한테 걸리면 너 혼자 혼나라."

 

"이봐."

 

동굴 입구가 보였을 때, 두 사람의 걸음이 동시에 멎었다.

 

불빛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화톳불 앞에 철혁이 앉아 있었다. 언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 저희는 곡식이 떨어져서—"

 

"넷이었다지."

 

희두의 말이 뚝 끊겼다.

 

철혁은 불을 바라본 채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어봐야 대답해주지 않을 게 뻔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철혁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봤나."

 

희두는 그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을 봤느냐고 묻는다면— 팔이 없는 사내를 봤고, 두 배로 오른 곡식 값을 봤고, 아무도 나서지 않는 장터를 봤다.

그리고 자신이 그 모든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봤다.

 

"...많은 걸 봤습니다."

 

철혁은 그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불로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덧붙였다.

 

"내일부터는 다른 걸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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